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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도시

9.26일 네이버 캐스트-[철학적 사건] 공통적인 것(the commons)에 관하여

(다음 대담은 위 인터뷰 영상을 바탕으로 가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최근 방한한 지젝을 비롯하여 영상에 등장하는 한국의 철학자, 이론가, 활동가, 논객 등 각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가상의 질문자가 내던지는, 한편으로 추상적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고루 동등하게 들어보려는 자리이다.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대담자들 사이의 논쟁의 장을 가상으로나마 마련하고자 했다. 질문자가 던지는 질문은 ‘문’으로 질문에 대한 각 답변은 대담자들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 왜 지금 공산주의를 다시 호출해야 할까? 이미 역사를 통해 그 이념의 시효가 다했음이, 그 실현이 결국에는 파국으로 끝났음이 입증되지 않았나? 지젝, 당신과 바디우가 주장하는 공산주의란 어떤 공산주의인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지젝: 저와 바디우에게 공산주의란 어떤 의미에서 영원한 평등주의적 이상(ideal)입니다. 그것은 이념(idea)에 해당하죠. 중요한 사실은 지금이 후기 자본주의의 위기의(critical)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게 공산주의란 도처에서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따위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차라리 그것은 우리 문명의 근본적인 한계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년 6월에 대한문 앞에서 투쟁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 관해 말하고 쓰고자 했던 바로 그 얘기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장을 수호하려는 어리석은 노동자들이 아니라고, 그들은 자신들이 삶의 방식을 지켜내려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이 점이 공산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극도로 중요한 핵심입니다. 공산주의는 혁명당이나 사회민주당처럼 특정 정당의 이념이나 텔로스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의 문화 전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보편주의의 의미란 무엇인가, 문화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때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의 총합이 바로 저와 바디우가 말하려는 공산주의라고 말입니다.

: 과연 이념 만으로 정치라는 게 가능할까요? 진중권 선생은 평소 자신의 정치 이념을 사민주의로 표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금 지젝이 말한 공산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양대 교수. 미학자. 진중권

진중권: 제가 보기에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 이념’ 혹은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란 다분히 신학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세속화된 신학의 의미에서 말이지요. 저는 도킨스와 같은 계몽주의자와 달리 각 개인에게는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죽은 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초월적인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이 입장도 최근에는 의심을 하고 있지만요. 개인적인 신념의 차원에서 공산주의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념이 정치 프로젝트가 될 때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제가 지젝 선생의 글을 읽어 오면서 느낀 생각은 그를 비롯하여 바디우, 아감벤 등이 좌파의 유토피아적 기획이 끝장난 뒤에 그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하고 ‘동일시’(identification)를 위해 그 상실을 다른 이념으로 계속 변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체성’과 ‘정치 프로젝트’는 분명히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 이진경 선생은 아마 다른 입장이실 거 같은데요, 지젝과 바디우보다 훨씬 앞서서 공산주의를 ‘코뮌주의’나 ‘코뮌이즘’으로 번안해서 ‘선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 인문학 공동체를 통해서 그 실천을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철지난 공산주의를 다시 꺼냈을 때 지젝과 바디우 같은 유럽에서 겪는 난점과도 또 다른 난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철학자 이진경

이진경: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서구나 한국에서의 상황은 비슷했을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에서 공산주의에 관해 말하는 게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란 체제에 위협적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측면이 강합니다. 누군가가 여전히 공산주의를 말하고 있다면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연민이나 안타까움 혹은 냉소가 배어있지 않을까요? 이와 달리 서구에서는 오히려 불편한 이미지를 더 강화했던 게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반공주의가 남다른데요, 구동독 시절이 히틀러의 제3제국 때보다 더 나을 게 없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 한윤형 기자는 지젝이 말한 공산주의를 들었을 때 어떤 인상을 먼저 받게 되나요? 공산주의에 대한 실감 같은 게 앞세대와 다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미디어스 기자 김민하(좌) 한윤형(우)

한윤형: 저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 역사적 공산주의와 별개로 말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소비에트 연방체제의 공과와 장단점을 평가하고 그 바탕 위에서 공산주의를 말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저는 민주주의자의 지향이 더 강해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그 이행을 이뤄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는 아직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 앞서 이진경 선생의 ‘코뮌주의 선언’처럼 공산주의 문제에는 역사적 현실이나 체제 문제 외에도 한국에서는 불가피하게 번역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당 부대표로 계시는 장석준 선생이 이에 대해 답해주시겠어요?

노동당 부대표 장석준

장석준: 공산주의라는 말 자체가 한국의 특수한 현대사에서 객관적으로 말하기 굉장히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북한과 연관해서 ‘공산당’이나 ‘전쟁’과 ‘학살’의 이미지와 그 기억에 붙들려 있지요. 그래서 세계 보편어인 공산주의의 번역어에 대해 이번 기회에 논의하는 장이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이진경 선생처럼 공산주의를 코뮌주의로 번역하는 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 번역어에도 ‘코뮌’을 우리가 들었을 때 서구처럼 곧장 공동체를 떠올리기 힘들기 때문에 이것보다는 ‘공생주의’가 낫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대한문 앞에서 투쟁하는 쌍차 노동자들의 구호였던 ‘함께 살자’처럼 즉각 그 의미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요.

이진경: 참고로 코뮌은 ‘합친다’는 의미의 콤(com)과 ‘선물’을 뜻하는 무누스(munus)를 결합시킨, 즉 ‘선물로 이뤄지는 관계’를 뜻합니다.

: 지젝도 언급했지만 작년 대한문 앞 분향소를 지젝이 방문했던 게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쌍용차 해고자. 노조기획실장 이창근

이창근: 작년에 지젝이 저희들에게 왔을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찾아와서 저희의 상황을 ‘조명’했습니다. 당시에 뭔가 ‘갇혀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지젝과 바디우의 방한에 대한 기대가 큰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분이 찾아오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만약 바디우나 지젝 본인이 우리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할 지가 무척 궁금합니다. 그리고 외국의 경우는 어떠한지도 듣고 싶습니다.

문화평론가 최태섭

최태섭: 제가 보기에 지젝이나 바디우가 오히려 한국과 서울에 대해 더 관심이 많지 않을까 생각해요. 한국 사회는 그 어느 곳보다도 자본주의가 겪는 최첨단의 증상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는 말그대로 ‘핫’한 곳이잖아요. 지금 대담처럼 지젝이 저희와 동등하게 대담하는 것도 그런 동시대성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이를테면 제가 제 책(『잉여사회』)에도 썼지만 한국에서는 가장 저렴하게 놀 수 있는 곳이 바로 사이버스페이스거든요. 소비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삶의 의미도 만들지 못할 때 이른바 잉여들이 가게 되는 ‘공유지’인 셈이죠. 어떤 면에서 이런 잉여들이 공산주의적 실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떡밥들을 쉴새없이 퍼나르고 말그대로 공유한다는 점에서요.

: 현실의 공통 지반이 붕괴되고 난 뒤에 등장한 게 ‘잉여’라고 할 수 있다면 본능적일 정도로 그 잉여들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해서 뭔가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을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붕괴된 뒤에도 여전히 어떤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김민하: 제가 보기에 세대론이 유행하거나 청년 논객이 호출되고, 여기 참석하신 지젝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던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물적인 기반이 붕괴되는 데 뒤따른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게 되면 모였던 이들이 다들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 측면에서 말씀하신 ‘공통적인 것’을 삶이 딛고 뿌리내릴 수 있는 ‘공통지반’(the common ground)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지젝: 20세기 내내 근대화를 급속하게 통과한 한국은 그런 측면에서 ‘영도’(zero ground)의 사회처럼 보입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힐링’의 붐도 그렇게 볼 수 있겠구요, 반대로 저는 ‘상처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황현산: 상처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확산되었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트라우마’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빈번히 사용되잖아요. 저는 이런 분위기가 제도나 체제 자체가 내부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체제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다른 체제에 대한 고민과 요구의 맹아가 움트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이 자리에는 ‘시와 정치’의 관계를 다시 고민하게 만드신 세 시인이 참석하셨습니다. ‘희망버스’의 기획자이셨던 송경동 시인과 용산 사태에 문학인의 목소리를 내셨던 진은영 시인과 심보선 시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먼저 진은영 시인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시가 현실 정치 운동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시인/사회학자 심보선(좌)과 시인/철학자 진은영(우)

진은영: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제가 대학 시절에 운동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단순히 제가 시인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란, 시인이란 순결한 것이어야 했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디우의 말처럼 시가 특별히 정치적 진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에는 아마 저보다는 심보선 시인에게 듣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심보선: 흔히 얘기하는 일상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사건’이나 ‘바깥’, ‘틈’이란 사소한 데서 시작합니다. 희망버스에 참석했을 때도 송경동 시인이 그냥 한 번 가자고 제안한 데서 시작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 결과는 예측 이상으로 더 멀리까지 빗금을 그리며 나아가게 되었지만요.

시인/활동가 송경동

송경동: 희망버스에서 김진숙 노동자가 선언했던 ‘노동자도 사람이다’는 주장에는 한 노동자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노동자이자 사람이자 시민이기도 한 전체 집단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노동자이고 누가 시민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모두가 노동자이고 시민이자 사람이라는 데 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권운동가 박래군

박래군: 저도 동의합니다. 지금까지 이른바 ‘시민사회론’은 개인으로 분류된 시민만을 지칭했습니다. 이제는 사회적 관계 속의 시민, 즉 누군가 ‘사회적 시민’으로 불렀던 것처럼 사회적 관계인 코뮌 안의 시민 간의 연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자유·평등·박애’ 대신에 ‘자유·평등·연대’를 ‘공통의 가치’로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참석자: 지젝(철학자), 진중권(미학자), 이진경(철학자), 한윤형(미디어스 기자), 장석준(노동당 부대표), 이창근(쌍차 해고자, 노조 기획실장), 최태섭(문화비평가), 황현산(문학평론가), 김민하(미디어스 기자), 진은영(시인, 철학자), 심보선(시인, 사회학자), 송경동(시인, 활동가), 박래군(인권운동가)

문순표(에오)
철학연구가
연세대와 독일 포츠담대에서 러시아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프레시안 북스와 인문예술잡지 f등 여러 매체에 기고했다. 현재는 '베버주의의 관점에서 본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칼 슈미트 사이의 근친성'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발행2013.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