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36&contents_id=36364
2011년 가을,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지는 99%를 자처하는 시위대로 채워졌다. <출처: ©Louis Lanzano>
2008년 이후 너도 나도 자본주의의 위기를 지적하면서 ‘임박한 파국’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보스에 모여든 세계 지도자들은 거창하게 자본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기도 했다. 앞 다투어 경제학자들이 언론과 방송에 출연해서 자본주의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분주했다.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자본가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과거에 역동적이었던 자본주의의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이기 징갈레스 같은 자유방임주의적인 경제학자는 물론, 폴 크루그먼이나 조지프 스티클리츠 같은 경제학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은 침체에 빠진 경제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도 과감히 용인할 수 있을 태세였다. 좌파든 우파든 금방이라도 자본주의가 끝나기라도 하는 양 호들갑을 떨었다. ‘아랍의 봄’이라고 칭송 받은 이집트 혁명이 일어나고, 월스트리트를 비롯한 금융자본주의의 중심지는 99%를 자처하는 시위대로 채워졌다. 상황은 사뭇 달라진 것 같았다. 90년대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거론되었던 다양한 이념들이 한낱 조롱의 의미 이상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였던 시기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탈정치와 탈이데올로기가 최신 유행어처럼 번져가던 것이 무색해졌다. 민주주의의 죽음을 이야기했던 정치학자들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복귀시키면서 정치철학의 문제의식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런 조건에서 과연 지금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 시기에 이미 낡아 버린 것으로 간주되어온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재사유할 것을 요청했다. ‘공산주의’라고 하면 한국처럼 북한을 떠올리는 곳도 있고, 미국처럼 유토피아주의의 실패작으로 간주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것은 다양하다. 공산주의를 재사유하는 논의에서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바디우의 의도이다.
이런 바디우의 사도를 자처하고 나선 이가 바로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은 바디우와 이루어진 한 대담에서 전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히며, 바디우와 함께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에 동참했다. 둘은 의기투합해서 각각 런던, 뉴욕,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서울에서 열리는 컨퍼런스는 네 번째로 열리는 것이자 동시에 아시아에서 처음 실행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념을 논의하기 위해 듣기만 해도 쟁쟁한 이름을 가진 세계적인 철학자들이 서울에 모이는 셈이다.
중국의 신좌파를 대표하는 왕후이까지 가세해서 명실상부한 아시아권 컨퍼런스가 될 전망이다. 이렇게 다양한 철학자들이 모이는 경우도 드물지만, 철학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서울로 온다는 것도 세계적 관심을 끌만한 일이다. 세기에 한번 일어날 수 있는 ‘철학의 사건’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지젝이 말하듯이,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이 문제야말로 지금 긴급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다. 어떤 체제가 바뀌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적대관계 때문이다. 지금 글로벌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생태적 파국, 지적 재산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합,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이 갖는 사회윤리적 함의, 가시적 장벽과 슬럼 지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분리주의.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실체로서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의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는 것을 막기 위한 저항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 상태를 방치했다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자각이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확산되고 있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 <출처: Siren-Com at en.wikipedia.org> | 바디우의 사도를 자처하고 나선 슬라보예 지젝 <출처: Andy Miah at en.wikipedia.org> |
이런 상황에서 왜 컨퍼런스는 아시아로 방향을 잡은 것일까. 무엇보다도 아시아가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가지는 역할이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발전과 지속은 바디우와 지젝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사태였다. 아시아 문제를 논의하기에 서울만 한 도시가 없었다. 지리상으로 여전히 역사적 공산주의 국가로 남아 있는 북한과 개혁개방을 통해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체제가 되어버린 중국 사이에 위치한 서울은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최적의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은 이제 한국의 도시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인 철학자들이 관심 깊게 지켜보고 있는 하나의 현장으로 새롭게 부상했다.
황폐한 소비의 도시인 서울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성찰하는 철학의 도시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지켜 나가야 할 ‘공통적인 것’에 대한 논의와 함께 이번 컨퍼런스는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개인을 구속하고 저해하는 국가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 이름 붙이자면 ‘무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움직임들을 이번 컨퍼런스에서 북돋우고자 한다. 이대로 지속할 수 없다는 각성이 모인다면, 새로운 출로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말처럼, 저자를 직접 불러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좋은 공부는 없다. 집필 기간이 오래 걸리는 책보다도 더 최근 논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의 최전방에 서서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들을 제공해온 철학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궁금한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것을 목격하는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귀중한 철학축제의 장이 서울에서 열린다. 이번 컨퍼런스는 2013년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된다. 9월24일부터 철학축제의 서막을 올리는 지젝 특강이 시작되어서 10월 1일에 바디우와 왕후이의 특강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외국의 철학자들만 와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방식이 아니다. 이들과 한국의 철학자들이 만나서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근대화와 자본주의, 그리고 공통적인 것과 무위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가 행사장을 장식할 계획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속한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컨퍼런스가 되기를 기원한다.
황폐한 소비의 도시인 서울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성찰하는 철학의 도시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출처: Duesride at en.wikipedia.org>
'철학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9.26일 네이버 캐스트-[철학적 사건] 공통적인 것(the commons)에 관하여 (0) | 2013.09.29 |
---|---|
멈춰라,생각하라 지젝 강연문 일부 발췌본입니다 (0) | 2013.09.22 |
9.18일 네이버 캐스트-지젝의 질문 그리고 한국 (0) | 2013.09.18 |
네이버 캐스트 - 철학자 바디우의 정치적 사유 (0) | 2013.09.17 |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독일 BLOCKUPY 운동 선언문 (0) | 2013.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