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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건

진은영 시인의 답변

아래는 진은영 시인이 28일 토요일 라운드 테이블 Q&A시 받았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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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손가락의

 

 

진 은 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미국 헌팅턴 도서관에서는 인쇄술이 도입된 이래 대영제국에서 가장 잘 팔린 책들을 전시한 적이 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 10권 가운데 3권은 동물사육, 바느질, 정원 가꾸기에 관한 조언을 담은 책들이었다. 이 전시회에 다녀온 한 심리상담 전문가는 수백 년 전에도 조언목록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에 감동받았다고 고백했다.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것은 손가락의 가장 평범하고 비()시적인 기능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평범한 기능이 주는 호감은 인생에 대한 강렬한 조언의 욕구와 더불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가리키는 방향, 장소, 사물들에는 뭔가 희망적인 구석이 있다. 손가락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 바라보거나 주목하고 성취해야 할 목표를 알려주는 조언의 신체이다. 아니, 가능한 조언목록들의 육화이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서 인생과 사물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장 직설적으로 전하는 말이 바로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이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조언의 신체가 절단되고 훼손되는 순간에, 그래서 손가락 자체를 보게 되는 순간에 내게 왔다.

오래 전 나는 가톨릭신학대학의 축제에 놀러갔다가 5.18 사진들을 보았다. 그 시절 나는 사람들의 영혼의 절반은 나무토막과 같은 무심함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천사의 솜사탕처럼 달콤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던 명랑한 십대였다. 그런 내게 광주의 살풍경을 전하는 사진들은 보아도 정확히 뭘 보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오히려 내내 기억났던 건 그 사진들 가운데 걸려있던 시 한편이었다. 어느 노동자가 프레스 기계에 손목이 잘려 병원에 가려는데 작업복 기름때에 자동차 시트가 더러워진다고 사장님도 공장장도 태워주질 않았다. 결국 너무 늦게 도착해 붙일 수 없어진 손목을 찬 소주에 씻어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다는 내용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그 시가 박노해의 손무덤임을 알게 되고, 어쩌다보니 과방에서 어울리던 친구들과 노동자 신문을 팔러 구로공단에도 가게 되었다. 우리는 노동자들과 함께 만나서 노동자 언론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도 하고 신문도 직접 팔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노동자 한 사람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두 시간쯤 지나서 첫 만남에 대한 설렘이 짜증과 불쾌함으로 변했을 무렵 그는 웃으면서 나타났다. 스물여덟 살 프레스공인 그는 두꺼운 붕대를 손가락에 감고 있었다. 철판을 자르는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려 병원에 다녀오느라 늦었다고, 그는 미안하고 무색한 듯 그러나 환하게 웃었다. 그 후로 12년 간 우리는 그의 잘린 손가락을 잡아도 보고 같이 밥도 먹고 신문도 팔러 다녔다. 그의 짧은 손가락을 보다가 내 길고 멀쩡한 손가락을 볼 때면 우리가 다른 두 세계의 경계에 각기 서 있다가 그가 잠시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옷소매를 쥐었다 놓고는 이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시의 어떤 구절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스스로 건드린 적이 없다. 밤의 숨결도, 불타는 뜨거움도. 사실 시의 은유 밖에서 표현된 그 삶들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킬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 삶은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순간에도 존중받지 못하는 삶, 스물여덟 살인데 과로와 피로로 마흔 살처럼 보이는 삶,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된 일이 만 원짜리 한 장을 잃어버린 일처럼 다소 찝찝한 일상이 되는 삶. 그런 삶은 따라할 만한 것도 의미를 찾을 만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손가락이 그걸 가리킬 수 있을 만큼 거기로부터 떨어져있다는 사실에 문득 안심이 되는 삶. 그것은 헌팅턴 박물관의 전시회가 증명하듯 조언목록에 결코 낄 수 없으므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할 삶이다.

 

이 시는 어떻게 왔는가? 잘린 손목에 달린, 없는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을 들어올려 내가 의도하거나 희망하지 않았던 어떤 풍경을 가리키게 할 것 같은 예감 속에서 이 시는 내게 왔다. 잘린 손가락들은 내게 고통 받는 삶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과 같은 선량한 도덕감이 아니라 멀쩡한 손가락에 대한 묘한 강박을 심어주었다. 시는 어떻게 오는가? 시는 자발적인 의지 속에서 더 멀리 가리키는 긴 손가락을 가진 것이 아니다. 시의 손가락은 부재의 손가락이고 그 부재로서 방향과 존재를 보여주는 생생하게 없는손가락이다. 시집 세 권을 내고 나서야 등단 전에 썼던 이 시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는 시의 손가락을 시인이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인은 제 발로 세계의 경계로 걸어가서 어떤 충돌과 절단과 훼손이 일어나는 폭력의 순간을 기꺼이 맞이하는 자발성을 지닐 수 있을 뿐이다. 그 순간이 사랑의 폭력이든 정치의 폭력이든 언어의 폭력이든, 그 난폭함 속에서 잘린 상투적인 손가락 아래 부재하는 손가락이 돋아나 시인 자신을 가장 잘 건드릴 수 있도록. 그러나 매순간, 제 발로 기어들어가 시의 건드림 속에서 서있을 용기가 내게 늘 있을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