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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춰라, 생각하라 ]/보도

9월 26일 경향신문 기사-‘공산주의의 이념’ 콘퍼런스 참여 철학자 동행인터뷰


[‘공산주의의 이념’ 콘퍼런스 참여 철학자 동행인터뷰](하) 알랭 바디우 “진정한 정치를 원하느냐가 중요…어렵단 이유로 포기해선 안돼”



프랑스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지난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다음달 2일까지 열리는 ‘멈춰라, 생각하라: 공산주의의 이념 2013 서울’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바디우는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여러 나라를 돌며 ‘공산주의 이념’ 콘퍼런스를 수년째 진행하고 있다. 바디우의 첫 한국인 제자인 서용순 영남대 학술연구교수가 그를 만나 서울 행사의 의미와 공산주의의 전망 같은 주제를 놓고 대담했다.

서 교수는 바디우와 인류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인 실뱅 라자뤼스가 함께 만든 좌파운동단체인 ‘정치조직’에 참여해 활동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서울 강남의 숙소에서 한국에 관한 바디우의 생각을 묻는 것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바디우는 “한국은 1950년대에 전쟁을 겪고 분단됐으며 이후 군사 독재를 경험했다. 오늘날 한국 체제는 서양 민주주의와 닮은 점이 있지만, 그런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고 했다. 그는 최근 정치상황에 대한 질문에는 “(여러 한국인 제자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 않나. 나 스스로 보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 앞으로 느끼는 점이 많을 테니 이야깃거리가 충분히 생길 것”이라고 했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와 제자 서용순 교수가 2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거리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 공산주의의 새로운 전망은?

“길어야 150년 된 이념을 아직 실험하는 단계
국가 통한 실현은 실패 그 경험서 재출발해야”


▲ 사회주의 국가들 떠올리는데?
“공산당이 권력 잡았지만 공산주의 운동은 포기
북한, 공산주의와 무관 민족·군국주의국일 뿐”


서용순=한국은 현재 상당히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지만 사람들의 삶은 힘들다. 한국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노동자들은 정말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들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1980~1990년대에 활발했던 정치적 투쟁의 열기도 거의 사라졌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세계적인 수준에서 심화되고 있는 이런 탈정치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바디우=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전 세계가 마찬가지라고 본다. 한국에서 정치적 투쟁이 활발했던 것은 1980~1990년대였고, 프랑스에서는 1960~1970년대였다. 탈정치화는 다른 여러 곳에서 비슷하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서용순=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그런 종류의 무기력은 제도적 정치에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의회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선거를 통해 그런 무기력을 조장한다. 당신은 선거라는 제도의 부정적인 측면을 계속 강조한다. 선거는 어떤 점에서 부정적인가.

바디우=선거는 기존의 경제적·사회적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절차다. 선거를 통해서는 정치 정당들의 정권 교체가 이뤄질 뿐이다. 미국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프랑스에서는 좌파 정당과 우파 정당 사이에 교체가 일어난다. 그들과는 다른 정치적 전통을 지닌 한국에서는 양상이 좀 다르겠지만 대체로 그런 식이다. 정권 교체는 철저히 평화적이어서 사람들이 여기에 완전히 동의한다고 전제한다. 실제 의회주의에서 권좌에 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정치적·사회적 시스템을 보존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투표를 하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런 합의에 따른다고 말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선거를 단순히 자본주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정치적·국가적인 조직 양식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레닌은 민주주의가 하나의 국가 형식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통해 가치와 이념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지만, 민주주의의 운영이 우선시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회민주주의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국가 형식이다. 그러므로 발전된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는 곧 선거에 대한 지지다. 자본주의와 선거는 항상 함께 간다.

서용순=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진정한 정치,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바디우=그런 정치가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정치를 우리가 원하고 있느냐이다. 그 다음에 역사적 상황이나 세계 속에서의 관계 등이 관건이 된다. 그러나 다른 정치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단지 그런 정치가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물론 어렵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정치가 더 쉬운 순간들과 더 어려운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가능한 것에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게 내 입장이다. 가능한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의회정치밖에 할 수 없다.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게 의회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위해서는 우선 여러 가지 원칙들이 지켜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창안이 필요하다. 

서용순=당신은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의 전망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이전의 여러 사회주의 국가에서 주장했던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새로운 공산주의가 전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디우=공산주의는 19세기 유럽에서 나온 이념이다. 원칙적으로 이 이념은 사적소유 또는 자본주의의 지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념은 평등한 사회, 여러 가지 문제를 공동으로 결정하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이념이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원칙이다. 그 다음에 실제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역사적 경험이 있다. 이 경험에서 대단히 심각한 오류 역시 나왔다. 인류 역사 전체에 비추어 공산주의 이념의 역사는 정말 짧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 몇 십년밖에 안되고 최대한으로 잡아도 150년이다. 결국 우리는 공산주의 이념을 실험하는 단계에 있는 것이다. 20세기를 관통하는 것은 국가 권력과 연결된 공산주의, 국가를 통해 실현되는 공산주의의 관념이었다.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경험의 결과를 고려하면서 그 이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서용순=한국에서 사람들은 공산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을 떠올린다.

바디우=왜냐하면 이른바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했던 이 국가들을 이끌었던 것은 공산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은 20세기 공산주의와 관련된 어떤 것을 실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문제는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운동의 문제다. 이 국가는 파산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국가가 공산주의 운동을 지지하고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이 국가들은 아주 빠르게 보수적인 국가가 됐다. 그들은 사회적·경제적 형식을 지키려 했지만, 공산주의 운동은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지 못했다. 결국 공산주의 이념의 완전한 실패였다.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 체제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표방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였고, 그 국가의 성격은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중간 단계의 국가였다. 실제로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에는 공산주의가 없었다.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공산주의적 운동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용순=당신에게 북한과 같은 국가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전망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다.

바디우=그런 질문은 한국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점을 아주 잘 이해한다. 내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북한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게다가 나는 북한이 현재 공산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서용순=얼마 전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말을 아예 강령에서 지웠다.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바디우=그랬나? 그럴 줄 알았다. 북한은 공산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나라였다. 나아가 지금은 그들 스스로도 공산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은 민족주의 국가, 군국주의 국가이다. 그것은 명백하다. 한국에 온 김에 확실히 선언하겠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북한과 그 어떤 종류의 관계도 없다. 

서용순=세계를 돌며 공산주의에 대한 콘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 서울은 4번째 개최 도시다. 서울 개최는 어떤 의미가 있나.

바디우=나는 국제주의적인 비전을 갖고 있다. 오늘날 국제주의자가 되는 것은 마르크스 당시보다 훨씬 더 필수적이다. 정치의 무대는 전 세계적이어야 하고 그럴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적이고, 공산주의도 그래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일국 사회주의의 시대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뭔가 전 세계적인 어떤 것을 해야 한다. 생각은 간단했다.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전 세계의 다른 장소에서 모아보는 것이다. 런던에서 1차 콘퍼런스를 열었고, 베를린에서 2차, 뉴욕에서 3차를 진행했다. 유럽에서 먼저 연 것은 아마 우리(바디우와 지젝)가 유럽 사람들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그 다음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콘퍼런스를 이어갈 것이다. 서울에서 네 번째 행사를 하는 이유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는 당신과 이택광 같은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웃음) 또 한국은 역사적 상징성이 큰 나라다. 현재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5차는 볼리비아에서, 6차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할 것 같다.

<대담 | 서용순 영남대 학술연구교수>


■ 의회정치 비판하는 시(詩)적 사상가
쌍용차 농성장 등 방문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바디우가 필요하다.” 지젝과 함께 동시대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바디우는 1937년 모로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사회주의자였다. 바디우는 20대에 사르트르주의자였고, 68혁명이 일어난 30대에 마오주의 운동가였다. 중국 문화대혁명 실패, 마르크스주의 쇠락 이후 다른 철학·정치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1985년 만든 ‘정치조직’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 단체로 꼽힌다.

바디우는 최근 한국 인문사회 분야 출판에서 ‘바디우 바람’이라 부를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공저를 포함해 올해 7종이 번역, 출간됐다. 최근작은 라캉, 푸코, 알튀세르, 들뢰즈, 데리다 등 친했거나 또는 불화한 스승, 동료에 대한 고찰을 담은 <사유의 윤리>(도서출판길)다. <투사를 위한 철학>(오월의봄)은 철학과 정치의 관계,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바디우는 27일 오후 5시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의 합동 기자회견으로 한국 일정을 시작한다. 바디우는 “내가 순수한 가능성의 영역에 처해 있을 때 자주 그런 것처럼 나의 결론은 시적(詩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방한에서도 ‘시적’인 행사가 기획됐다. 28일 플래툰 쿤스트할레에서 심보선·진은영·송경동 시인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30일은 바디우 일정의 하이라이트다. 콘퍼런스 공동 주최자인 유령학파가 이날 오후 6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단식 농성 중인 대한문에서 벌이는 침묵 시위 퍼포먼스 ‘詩위, Protestry-Occupy with Poems(시로 점령하라)’에 참여한다.

고은 시인도 퍼포먼스에 동참한다. 고 시인과 바디우는 퍼포먼스가 끝나고 단식농성 중인 쌍용차 해고 노동자도 찾기로 했다. 유령학파는 “대한문은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며 “시어로 희망의 언어를 재현하려고 기획한 행사”라고 말했다.